작성자 광성사
작성일 2011-03-07 (월) 20:51
ㆍ조회: 6337    
티벳불교의 소개

티벳불교의 소개

(티벳의 불교전파는 티벳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게에 불교사와 티벳의 역사를 같이 말하겠습니다. )

티벳에 처음으로 불교가 소개된 것은 최초의 통일 티벳 왕국이 건국된 7세기 전반의 일이다.   그러나 많은 티벳인들은 휠씬 이전에 불교가 소개 되었다고 말한다.

A.D.374년 28대 왕인 '라 토토리녠첸(Lha Thothori  nyantsen)' 이 태어났는데, A.D. 433년 그의 나이가 60세가 되던 해어느 날 티벳의 왕궁인 '윰부라캉(Yumbu Lhakang)'의 하늘에 아주 맑고 깨끗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는데  

 <윰부라캉- 티벳의 초대 왕이었던 '냐티첸뽀' 명으로 얄룽계곡에 세워진 왕궁이다. >

 

그 중심에 꽃비가 내리고 신들의 연주소리가 들렸으며 빛이 비쳐지는 속에서  금으로 된 종이에 '베뚜야'라는 보석으로 글을 새긴 "빵꽁착가와"라는 경전과 "사마똑"이라는 경전,  그리고 금탑이 그의 왕궁으로 내려왔다.

왕은 이를 살펴보았으나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으므로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것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소중한 것들이니 잘 공양하고 보물창고에 소중히 보관하라고 명했다.

며칠 후 왕은 꿈을 꾸었는데 왕은 꿈 속에서 그 경전의 의미들은 5대가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티벳인들은 이때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졌다고 말 한다.

(또다른 역사서에 따르면 인도에서 온 승려들이 경전과 탑을 공양했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성물들을 잘 지키고 공양한 공덕으로 라 토토리녠첸은 점점 젊어져서 120세 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5대 후인 A.D.617년 유명한 왕 '송첸감뽀(Songtsen Gampo)'가 태어났다.   그는 불과 13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송첸감뽀는 강력한 국력으로 약 40여개로 쪼개져 있던 티벳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켰는데 이것이 잘 알려진 토번왕국이다.   또한 그 국력은 네팔과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에 네팔의 왕 '암슈바바'와 중국의 당태종은 각각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문성공주'를 송첸감뽀에게 시집보내어 그를  달래려 했다. 티벳인들은 이 두 공주를 네팔인 도우미,   중국인 도우미 라는 뜻의 '발샤', '갸샤'라고 부른다.   티벳의 전승에는 송첸감포와 두 부인은 관세음보살과 그의 화신인 백색, 녹색 따라 보살의 화신이라 전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집'보냈다는 것이다. 중국은 우회하여 '공주를 보내줄것 을 사위의 예로서 부탁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티벳이 중국의 속국이 되었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있다. )  

<라싸의 조캉사원에 모셔져 있는 송첸캄포의 상>    송첸감포는 신하 '퇸미삼보다'와 학식있는 젊은이 열여섯 명을 인도로 유학보내 산스크리트 어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후에 '퇸미삼보다'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라싸의 북쪽에 있는 파봉카 라는 곳에서 산스크리트 어를 본따 티벳의 문자를   만들자 자신도 4년 동안 그것을 습득하였다. (티벳의 글자는 기본적으로 자음30개와 모음4개를 사용하는 표음문자이다.)

 

 <티벳글자를 만든 퇸미삼보다와 티벳글자(기본이 되는 자음30개)>   네팔과 중국의 공주들이 티벳으로 올 때 결혼예물로 다양한 보석과 불상들을 모셔왔는데 네팔공주인 브리쿠티 데비는   연등불께서 축복한 아촉불과 미륵불의 불상을 모셔왔고. 또 중국의 문성공주 또한 결혼예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직접   축복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을 모셔왔다.   이들 불상을 위해 조캉사원과 라모체사원이 세워졌는데  이 두사원에는 모두 전설이 전해진다.   먼저 조캉사원의 전설은 이렇다. 어느날 문성공주가 꿈을 꾸었는데 거대한 여자마귀가 나타나서는 자신이 '티베트'라며   만약 불교를 티벳에 전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에 문성공주는 그 마귀의 힘을 죽이기 위해서 마귀의 심장에   해당되는 라싸의 어느 호수를 메꾸어 사원을 지어달라고 왕에게 부탁했고 그리하여 조캉사원이 세워졌다한다.  

<라싸 서장박물관에 소장중인'마녀 지도' 양 유방의 한 가운데 조캉사원이 그려져 있다.>    

라모체 사원은 문성공주가 자신의 석가여래 상을 수레에 태워 모셔오고 있는데 갑자기 그 수레가 땅에 붙어서는 움직이지 않았고 이를 부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문성공주는 수레의 사방으로 기둥을 세우고 비단으로 천막을쳐 임시로 법당을 세운후 다시 건축하여 라모체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모셔온 석가여래상은 티벳에서 '조워린뽀체(Jowo Ronpoche)'라고 불리는데 직역하면'석가모니 보배'라는 뜻으로 티벳에서 가장 신성한 불상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 불상은 천신들중에 공예와 예술의 신들이 석가모니께서 살아계실 때 허락을 받아 부처님의 12살때 모습을 그대로 만든 불상이라하며 인도의 왕이 중국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보낸것을 문성공주가  티벳으로 모셔왔다전한다.

<브리쿠티 데비의 불상, 문성공주의 불상>

송첸감뽀 사후 중국이 침략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 두 불상은 위치를 옮겨 브리쿠티 데비의 불상은 라모체로, 조워린뽀체는 조캉으로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송첸감뽀는이외에 '상융사', '루용사', '몽사티짬'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비가 더 있었으며,  이들 왕비에게 각각 법당이 하나씩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법을 제정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중국의 오대산에 티벳 사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는 아직 일부 왕족과 귀족들만 믿는 소수종교에 불과 했다.  티벳 사회는 토속종교인 ‘뵌(bon)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아직 불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A.D. 742년 38대 왕'트리송데첸(Trisong Detsen)'이 태어났는데, 그는 열네살에 왕이 되었다. 그 당시 불교를 좋아하지   않은 본교의 사제들과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또한 인도의 위대한 스승인   '시와초(샨타락시타Santaraksita)'와 밀교의 위대한 스승인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를 모셔왔다.    산타락시타는 경,율,논을,  파드마삼바바는 근기가 되는 이들에게 밀교를 가르쳤다.  

<파드마삼바바와 산타락시타(하단 왼쪽), 트리송데첸(하단 오른쪽)을 묘사한 탕카>   파드마삼바바는 티벳에서 '구루 린뽀체' 즉 보배로운 스승 이라는 존칭으로 불리어 진다. 전설에 따르면 아미타불의   가피로 우겐국(國)의 다나코샤 호수에서 핀 거대한 연꽃에서 스스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파드마삼바바와 산타락시타등이 티벳오자 본교 사제들은 즉각 반발했고 이에 왕은 불교와 본교 양측의 대표들로 하여금   종교적 교리 토론, 신통력 경쟁등을 시켰고 결국 본교가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불교가 정식으로 국교가 되었고 왕은 티벳최초의 승원인 삼예(Samye)을 세웠는데 12년간 네팔, 중국의 기술자들을   불러 공사를 했는데 완공되던날 삼예의 하늘에 쌍무지개가 뜨고, 조각된 짐승들은 울어대고, 불상들은 법을 설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티벳 최초의 승원 삼예>   왕은 귀족의 자제 7명을 출가사켜 최초의 승단을 만들었고 비로서 티벳에는 불, 법, 승 삼보(三寶)가 있게되었다.   또한 산스크리트어와 한자로 쓰인 불경들을 티벳 문자로 번역하는 일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수행하고, 사원과 승려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주었다.    왕실이 중심이 되어 불교를 후원하자 티벳에 들어온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의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예의 대논쟁"이다.    중국의 선사 마하연(摩訶衍)과 산타락시타의 제자 까말라쉴라(Kamalashrila)가 트리송데첸의 앞에서 토론을 한 결과   결국 중국 불교가 패하였고 티벳에는 인도의 밀교가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완전히 티벳을 바꿔놓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왕가를 주축으로 한 사람들이 불교를 후원하고, 왕과 권력을 다투던 일부귀족들이   뵌교를 지지했기 때문에 티벳 사회는 종교로 인한 갈등과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겪어야했다.

 9세기 전반에 티랄빠첸(Triral Pachen 815~838)왕은 지나칠 정도로 사원과 승려들에게 풍부한 후원을 해주자
  국가의 재정과 병력이 흔들릴 정도가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영토도 이미 많이 빼앗긴 상태였다. 그러자, 불교 때문에   억눌렸던 뵌교의 사제들과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귀족들이 결탁하여 티랄삐첸 왕을 암살하고 왕의 형인   랑다르마(Rang Dharma 838~842)왕을 왕위에 앉혔다. 랑다르마는 불교사원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키고 불경들을 불태워서 불교를 완전히 소멸시킬 정도로 극심한 탄압을 했다. 그때부터 거의 100년 동안 티벳에는   공식적인 사원이나 불교를 배울 곳이 없었다.    이때 생긴 유명한 불상이 있는데 문수보살과 미륵불의 상이다. 랑다르마왕이 망치를 들고서는   "너희들이 진정 부처와 보살이건데 나에게 설법을 해보아라 아니면 부숴버리겠다." 라고 말하자   그 두 불상이 실제로 이야기를 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랑다르마왕은 그 두 불상은 부수지 않고 나뒀다고 한다   (이 두 불상은 현재 남인도의 톨링사원에서 보관중이다.)        랑다르마왕이 죽게 된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랑다르마왕은 각지역의 미인을 뽑아다가 하룻밤을 한후 죽여버렸다.  그 이유는 그는 혀가 푸른색이고 이마에   뿔이난 괴물의 모습이었기에 그 모습이 세어나가는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던중 한 여인이 뽑히게 되었다. 그러자 그 여인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신을 젖을 빼어주며 비방을   알려 주었다. 그 여인은 어머니가 시킨대로 왕과 잠자리를 하기전에 그 젖을 먹였고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당신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었다. 그러므로 우리 둘은 한 젖을 먹은 남매와도 같은데 나를 죽이려 하는가"   라고 말했고 이에  랑다르마왕은 자신이 어릴때 죽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녀를 살려두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설하지 말것을 엄중히 이르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뒤로 이어지는 전설에 따르면 그 여인은 어느 바위틈에 "랑 다르마왕은 머리에 뿔이나고 혀가 푸르다!" 라고   외쳤는데 그 사이에서 대나무가 솟아났고 한 목동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자    "랑 다르마왕은 머리에 뿔이나고 혀가 푸르다!" 라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퍼졌고 가뜩이나 박해를 당해 불만이 극도에 달한 불교신자들과 민중들은   민란을 일으키게 된다.     842년 랄룽 팔기 도르제(Lahlung palgyi dorje. 이하 '도르제') 라는 승려는 왕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라싸로 들어간다.   새해의 첫날은 전통에 따라 전 해의 묵은 기를 내보내기 위해 조캉사원 마당에서 춤을 추었는데   이때 왕과 모든 문무백관들이 나와서 춤을 관람하였다. 도르제는 검은색 예복을 입고 무용수 처럼변장하고   옷속에 활과 화살을 숨기고는 춤에 참가했다.   

 

<도르제가 랑다르마의 미간에 화살을 쏘아 시해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   그때 랑 다르마는 티베트,중국간에 체결된 조약이 새겨진 돌비석(당-토번 회맹비로 불리며 아직도 조캉사원의 앞에 서있다.)   을 읽으려고 몸을 숙였고 그때 도르제는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미간에 꽂혔고 그 혼란을 틈타 도르제는 말을 타고   도망을 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검은색 예복의 안쪽은 흰색 만들고 백마를 숯검댕으로 검게 찰하고 도망을 갔는데   강을 건너면서 옷의 안팎을 뒤집어 입고 강물에 말을 씻겨 다시 백마로 만들어 군사들이 그를 찾지 못하도록 하였다.   왕이 죽자 모든 백성들이 왕궁으로 가 랑다르마와 같이 뿔이 나고 혀가 푸른 왕실의 가족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그래서 티벳의 옛 전통중에는 낮선사람에게 인사를 할때 정수리가 보이도록 인사를 하고 혀를 보여주는 풍습이 있었다.)   랑다르마가 죽은후 티벳은 중앙정권이 없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4백년을 지냈다.   게다가 이미 많은 사원들이 문을 닫고 승려들 또한 환속하거나 숨어 버려 불교의 맥이 거의 끊겨버리게 되었다.   이때를 틈타 삿된 무리들이 멋대로 불법을 가르쳐 사회적으로 혼란하게 만들었다. (티베트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붉고 푸른 가사를 두르고 상투를 튼 삿된 무리들이 불법을 멋대로 해석...")

    그 틈을 타 AD.1207년에 몽골이 티벳을 침략하였다. 중앙정부가 없는 소국 상태로 갈라져 있던 티벳은 몽골을 막아낼   힘이 없었고 곧바록 항복을 하고 몽골에 조공을 바치기로 한다.  원제국은 티벳이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물러났다가   칭기즈칸의 죽음으로 조공을 뜸하게 하자 아께데칸의 아들 고단칸이 AD.1240년에 다시 쳐들어왔다. (말이 쳐들어 왔다지 정찰대 수준의 군대를 보내어 약 500여명의 티벳인을 죽였다.)   이때 당시의 유명한 샤까파의 고승'샤까빤디따 꿍가겔첸(Sakya pandita kunga gyaltsen.이하 '꿍가겔첸')이   높은 영적인 힘을 가졌다는 소문을 들은 몽골의 황제 고단칸은 사신을 티베트로 보내 그를 몽골로 모셔 오도록 시킨다. (말이 좋아 모셔오는 것이지 고단칸이 당시 꿍가겔첸에게 보낸 편지는 반 협박조이다.)   그리하여 꿍가겔첸은 고단칸에게 불교를 가르치게 되었고 또한 인구를 줄이기 위해 포로로 잡힌 한족들을 산채로   수장 시키는 것을 금해줄것을 요청했고 이에 수많은 한족들, 즉 중국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꿍가겔첸은 4년간 몽골에 있었고 그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AD.1252년 쿠빌라이칸이 왕위에 오르자 일찍이 꿍가겔첸을 따라온 꿍가겔첸의 조카 '팍빠 로되겔첸'이 쿠빌라이칸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그리고 '팍빠 로되겔첸',  이분이 역사책에 '팔사파(八思巴)'로 나오는 분이다.   

 <백옥으로 조각한 '팍빠 로되겔첸', 즉 팔사파의 상>   로되겔첸은 쿠빌라이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쿠빌라이게 불교를 가르쳤는데 당시 로되겔첸의 학식은 어떠한 질문을   받아도 모두 대답을 할만큼 학식이 뛰어났다   로되겔첸은 후에 국사로 임명되어 불교를 전했다. 그는 쿠빌라이칸의 요청으로 몽골과 의 새로운 글자인   '파스파 문자(八思巴 文字)'를 만들었는데 이는 몽골과 그 속국들, 몽골이 전통적으로 쓰던 위구르 어와 티베트어,   또 표의문자인 한자를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쿠빌라이칸의 간절한 요청으로 쿠빌라이칸과 왕비, 왕자, 신하들   에게 밀교적인 관정(觀頂)을 내렸고 그 보답으로 쿠빌라이칸은 몽골이 직접 통치하던 티벳을 로되겔첸의 종파인 샤까파가   다스리게 하였고 로되겔첸을 왕으로 삼았다.  티벳의 행정구역은 원제국의 정책대로 13개의 주로 나뉘었지만, 원제국이  

 
이름아이콘 천음성
2013-05-30 10:45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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