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HHDL
작성일 2015-08-18 (화) 23:38
ㆍ조회: 984    
입보리행론 법문 중에서
시작 없는 옛날부터(무시이래無始以來) 지금까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마음은 항상 있었을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하지 않기에, ‘어떤 것은 행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며 ‘어떤 것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이라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의 경우, 행복을 원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행동을 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타락하게 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고 어리석다.’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들 자신이 제일 영리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만심. 분노. 질투심. 집착 같은 번뇌와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번뇌들을 제일 가까운 친구로, 온 마음을 의지하는 친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번뇌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를 보아도 그 과보가 나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근본번뇌인 삼독과 여러 가지 번뇌에 마음을 뺏기고, 의지하면 나중에 나쁜 일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분노가 일어날 때 이 번뇌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처럼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우쭐거리거나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화가 납니다.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분노는 자신에게 또 다른 만용을 부리게 합니다. 분노로 인해 만용이 생깁니다.

평상시 아주 순한 사람도 화가 나면 ‘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화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집착이 일어나서 자기 자신을 아껴주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노가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 같습니다. 질투를 할 때도 ‘너,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후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라고 여기는 아집을 마음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을 자신의 마음 가운데 지니고 있습니다. 번뇌의 뿌리인 ‘나’라고 여기는 아집은 나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함께, 서로를 돕고 돕는 사이입니다.

아집을 마음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위없는 구원자. 길잡이. 친구처럼 여겼지만, 결코 이것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거나,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행복만을 바라지만 순간순간 끊임없이 불행한 일들이 생깁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고통들 가운데 하나를 없애고 나면 또 다른 고통이 다가옵니다. 또다시 다른 고통 하나를 없애면 또 다른 고통이 계속해서 다가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우리가 업과 번뇌로써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오온五蘊)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한편, 오온은 어떤 것들에 의해 생기는가? 
그것은 업과 번뇌에 의해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인 무명이 아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뿌리인 무지 즉 아집을 자신의 마음에서 완전히 없애기 전까지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의 경우, 삼독의 씨앗이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한, 아직 다른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아 눈에 띌 정도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삼독과 같은 번뇌 중에서도 무지 즉, 아집과 이기심이 서로를 도우면서 마음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스스로의 경험을 생각하며 타인을 위해,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28 고통을 여의려는 마음은 
오히려 고통을 향해 내닫게 하는 것이며 
행복을 원하는 것 또한 그 어리석음에 의해 
자신의 행복을 적과 같이 파괴하네.

이런 경우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 ‘아집’과 ‘이기심’이라는 적을 이기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비슷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구나!”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아집我執)과 현상들이 연기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법집(法執)을 적으로 여겨, 이기심과 법집을 이길 수 있는가를 보고, 이기심과 법집을 이기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 수행자의 진정한 임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라면 공성을 깨달은 지혜로 법집을 없애고, 티 없이 정화된 보리심 수행으로 이기심을 없애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도 기쁘고 벗들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행복하며 궁극적으로도 행복하고 언제까지나 영원한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29 자신의 안락이 다해 
많은 고통 속으로 빠져버린 중생이 
모든 행복으로 만족하고 
모든 고통을 끊게 하니,

30 무지함까지도 없앨 수 있는 
이런 선행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변함없는 벗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복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이런 변함없는 벗’이란 보리심은 언제까지나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31 도움을 받은 것에 보답을 하는 사람이 
칭찬을 받을만하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보살들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세간에서 이전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은혜를 기억했다 갚는 것이 칭찬받을 만하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고 끝없이 베푸는 보살들이 칭찬받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32 몇몇 중생에게 하찮은 음식을 베풀고, 
(겨우) 한 번 먹을 만큼을 보시하고, 
괄시하며 잠시 허기를 면하게 했을지라도 
그가 덕행을 행했다며 칭송을 하네.

흔히 ‘베품’이라 하면 병든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몇몇 중생”은 소수의 중생을 의미합니다. “하찮은 음식을 베풀고”는 썩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은 양의 음식을 말합니다. “한 번 먹을 만큼” 혹은 “잠시 허기를 면할” 정도는 짧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괄시하며” 즉 얕보며 베푼 베품은 하등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로종lojong(마음닦기修心)에서 
“내가 모든 중생을 향하여, 그 누구와 함께 하더라도, 
모든 사람 가운데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진실한 마음을 베풀게 하소서.” 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나병환자.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크게 이롭습니다.

그렇지 않고 돈을 던져 준다거나 하면서 생색을 내거나 멸시가 섞여있다면 보시를 받는 쪽에서 돈을 보고 좋아하다가도 보시를 하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고는 기쁘지 않은 쪽으로 기울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는 진정한 애정을 주고, 그 다음 존중하는 마음으로 베푼다면 받는 상대방의 마음도 기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일반적인 선행들도 ‘괄시하며 베푼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동기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으며, 행위 그 자체도 그다지 좋지 않았으며, 선행을 한 후에도 그다지 회향을 한 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행을 했다고 합니다.

33 한량없는 중생에게 긴 세월동안 
여래의 위없는 안락과 
한없는 서원을 이루게 하려고 
늘 보시하는 것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는 보리심이 마음속에서 진정 우러나, 눈앞에 보이는 몇몇 중생이 아닌 허공처럼 한없는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중생에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허공계가 존재하는 한” “모든 중생이 있는 한” 모두가 일체지를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의 위없는 안락”이라 하신 것입니다.

“한없는 서원을 이루게 하려고..” 하는 보리심의 장점과 이로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행위 즉, 오직 타인만을 위하는 것은 보살의 아름다운 행위로, “늘 보시하는 것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신 것입니다.

요약하면 모든 중생이 고통의 뿌리에서 벗어나, 일체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끄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칭송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말이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다.

34 누구든지 이렇게 베푸는 보살을 향해 
만일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악한 마음을 일으킨 그 수만큼의 ‘겁’ 동안 
지옥에 머물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35 만일 어떤 이가 (보살을 향해) 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행한다면 
그 과보는 훨씬 더 늘어나리라. 
보살에게 아무리 어렵고 큰 일이 생기더라도 
악업이 되지 않고 선업만이 증장되리라.

36 마음에 그 거룩한 보배를 일으킨 
그의 몸에 절하나니! 
심지어 해를 끼친 사람조차도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안락의 근원이신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유익한 마음이 생기려면 목표를 두고 실천해야 합니다. 목표를 두고 실천한다는 것은 의미가 그릇된 것도 아니며, 순서가 뒤바뀐 것도 아니며, 뭔가를 빠트린 것도 아닌, 조건을 다 갖춰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습성으로 익혀온 마음속의 이기심 즉 이기적인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마음이 따로 있고, 보리심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런 의식에서 서서히 습관을 들여, 언제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변하게 하려면 마음에 습성을 들이고 익힘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에도 정확한 순서와 바른 방편과 모든 것이 갖춰진 방편으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대자비’에 이르려면 많은 단계를 거칩니다. 일반적으로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하는 마음을 비(悲)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자비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우리들 마음속에 ‘한쪽으로 치우친 자비심’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거나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아!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자비가 일어납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자비’를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마음이니, 이런 마음의 힘을 점점 키워야 합니다.

이런 힘을 키워 나가면 나중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면 단지 내가 아는 사람만을 위한 ‘대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적에게조차 ‘대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허공과 같이 수많은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또한 이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실천하겠으며, 이로서 마음을 굳건히 하고, 모든 중생의 고통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쌍히 여겨 중생을 돕는 그 마음을 ‘대자비’라 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작은 자비심은 한쪽으로 치우친 ‘기운 자비심’입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가까운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 나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원수가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 ‘그가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참 잘됐구나!’ ‘아주 고소하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기운 자비심’입니다.

그러므로 한쪽으로 기운 자비심을 멀리하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심이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자비심은 나를 기준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평상시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면 ‘아! 불쌍하다!’ 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평상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아무 생각이 안 들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자신으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잘 하고, 잘못하고’를 떠나서, 모든 중생이 고통은 바라지 않고 행복만을 바란다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아무 관련 없는 사람도 고통을 받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고통을 볼 때 ‘아!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고통에서 벗어났으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 대해 은혜로운 생각이 있어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통을 바라지 않고 행복만을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역시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고통에서 벗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입보리행론 법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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